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거리에서 시작된 영화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와 실직자들, 분열된 가족들, 복구되지 않은 사회 구조는 국민의 일상과 감정에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한 영화 흐름이 바로 '네오리얼리즘'입니다. 기존의 세트장 중심 스튜디오 시스템이 아니라, 실제 거리와 주택가에서 촬영했고, 전문 배우 대신 일반 시민이 출연했습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는 독일 점령 하의 로마를 배경으로 저항운동가들의 삶을 그리며 네오리얼리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은 실직자 가장의 고통과 절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전 세계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의 이탈리아를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했지만, 감정선은 훨씬 더 섬세하고 깊었습니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영웅 서사나 낭만적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현실은 불완전했고, 주인공은 실패했고, 결말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성, 모호함, 인간다움이 새로운 미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네오리얼리즘은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 체코 뉴웨이브, 이란 리얼리즘까지 전 세계 영화 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스 누벨바그: 형식을 해체한 반항의 카메라
1950년대 후반, 프랑스 젊은 비평가 출신 감독들이 기존 영화 문법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은 '누벨바그(Nouvelle Vague)', 즉 '새로운 물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장-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등 전후 세대의 독창적인 감독들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어린 소년의 성장과 방황을 통해 사회와 제도에 대한 비판을 전하며,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는 카메라 워크, 편집, 내러티브 구조까지 모두 새롭게 뒤흔든 작품이었습니다. 고정된 삼각 구도를 벗어나고, 대사 없이 긴 침묵을 유지하거나 주인공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누벨바그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반대하며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했고, 저예산으로 제작하며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했습니다. 즉흥적 대사, 비선형 구조, 불완전한 인물은 그 자체로 현실적인 감정과 사유의 흔적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흐름은 이후 미국 뉴시네마, 독립영화, 작가주의 영화의 기초가 되었고, 상업성과 거리 두기를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새로운 방식의 영화 만들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작가주의 영화의 탄생과 유럽 영화의 정체성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는 단순한 영화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감독을 '작가(auteur)'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왔습니다. 이전까지 영화는 감독보다 배우나 스튜디오 중심으로 소비되었지만, 이 시기부터 감독의 개인적 시선, 정치적 철학, 철학적 질문이 영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 명의 감독이 각본, 연출, 편집까지 책임지며 작품 전체에 자신의 미학을 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프랑스의 알랭 레네,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스웨덴의 잉마르 베리만 등은 시대, 문화, 종교,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로 전 세계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자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작가주의 영화(Author Cinema)'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었고, 이후 유럽 영화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작가주의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시대의 정신과 문화적 다양성을 표현하는 예술적 도구로서 계속해서 의미를 가졌습니다. 현재도 유럽 주요 영화제에서는 이런 전통을 계승한 감독들의 작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유럽 영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유와 예술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