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할리우드의 희생자 여성상: 침묵과 고통의 중심
1920~30년대 할리우드는 남성 주도적인 이야기 구조 속에서 여성 캐릭터를 종종 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브룩스가 출연한 Pandora's Box(1929)나 릴리언 기시의 The Wind(1928) 같은 작품에서 여성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순결한 희생자로 그려졌습니다. 이 시기의 여성 주인공은 주체적인 선택보다는 환경과 남성 캐릭터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할리우드 초기 영화산업은 시각적 감정의 극대화를 위해 여성의 고통, 눈물, 불행을 서사 구조에 반복적으로 끌어들였고, 이는 남성 관객의 감정적 동일화를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Stella Dallas(1937)의 바버라 스탠윅은 어머니의 헌신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며 관객의 눈물을 자극했고, 그 대가는 스스로 사라지는 희생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여성 캐릭터는 역사적으로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기반한 전형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체보다는 객체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관객은 여성 캐릭터의 내면 감정에 몰입하게 되었고, 이러한 구조는 여성 서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필름 누아르와 팜파탈의 등장: 위험하고 주체적인 여성
1940~50년대 필름 누아르는 전후 사회의 불안과 변화 속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에 도전하는 캐릭터를 대거 등장시켰습니다. 이 시기의 여성 주인공은 단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욕망과 계략, 그리고 파멸을 동반한 결정권을 가진 인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Double Indemnity(1944)의 바바라 스탠윅, Gilda(1946)의 리타 헤이워스는 단순한 유혹을 넘어, 남성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팜파탈(femme fatale)의 전형이 됩니다.
이 시기의 팜파탈 캐릭터는 냉혹하고 계산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그녀들은 남성 주인공의 시선 안에서 움직이는 동시에, 그 시선을 통제하는 능동적 존재였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결말에서는 종종 사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장치로서 팜파탈이 죽거나 배제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곤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필름 누아르는 여성의 주체성을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경계하고 통제하려는 서사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긴장 구조는 이후 많은 스릴러와 범죄영화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여성 캐릭터는 더 이상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으로 전환됩니다.
현대 영화 속 독립 여성: 자율성과 연대의 서사
1980년대 이후 여성 서사는 점차 기존의 전형을 탈피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Alien(1979) 시리즈의 리플리(시고니 위버)는 남성 중심의 SF 장르에서 생존자이자 리더로 그려졌으며, Thelma & Louise(1991)는 여성 간의 연대를 통해 기존 사회 규범에서 탈주하는 로드무비의 형태를 띱니다. 이 두 영화는 각각 '남성의 세계' 안에서 주체성을 획득하는 여성과, '여성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인물상을 제시합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Erin Brockovich(2000), Frida(2002), Lady Bird(2017), Little Women(2019) 등 현실 기반의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지 남성 주인공의 반사체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선택, 실패와 성장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합니다. 또한 Kill Bill의 '브라이드'(우마 서먼)는 복수의 전사이자 모성적 존재로서 이중적 면모를 드러내며, 폭력적 장르 안에서도 새로운 여성의 표상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현대 영화의 여성 주인공은 자율성과 다양성, 연대와 저항의 키워드와 맞닿아 있으며, 이 변화는 영화 산업 내부의 제작 구조와 여성 감독, 시나리오 작가의 증가와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캐서린 비글로우, 클로이 자오, 그레타 거윅 등 여성 감독들은 독창적인 시선으로 새로운 여성 서사를 구축해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