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캐릭터의 감정은 진짜일까: 《Her》의 사만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는 음성 기반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인간 '테오도르'의 관계를 그립니다. 사만다는 물리적 실체가 없지만, 감정을 표현하고 인간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문제는 그 감정이 실제인지, 프로그래밍된 반응인지 구별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위로받고, 사랑을 느끼며, 감정적으로 성장합니다. 이는 관객에게 '주체성'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만다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 독립적인 존재로 보일 때, 관객은 그녀를 캐릭터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영화는 감정적 교류의 진정성이 외형적 인간성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목소리만으로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 캐릭터는 인간 배우가 가지지 못한 '무형성'이라는 특성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합니다. 사만다는 수백 명과 동시에 대화하면서도 테오도르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 모순적인 설정은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함께, '연기'란 무엇인가를 되묻습니다. 사만다의 연기는 진짜 연기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의 모사인지 모호해지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복제된 정체성의 위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조이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간과 복제인간, 그리고 가상 인격체 간의 관계를 정교하게 직조합니다. 특히 주인공 K의 연인이자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조이는 눈에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조이는 K를 진심으로 위하고 보호하려 하지만, 그녀가 기업이 만든 상품이라는 사실은 그 감정의 진위에 의문을 남깁니다.
조이는 사용자 맞춤형으로 프로그램된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K의 감정에 맞춰 반응하고, 그의 정체성을 지지하며,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 수많은 동일한 조이들이 광고 영상으로 등장하면서, 그녀의 개별성은 붕괴됩니다. 이는 관객에게 충격을 주며, 인공지능 캐릭터가 단일 개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감정은 진짜였지만, 그 감정을 공유하는 수많은 복제본이 존재할 때, '나만의 캐릭터'라는 인식은 무너지게 됩니다.
이처럼 가상 캐릭터의 '존재론적 위기'는 단순히 AI의 기술적 문제를 넘어서, 인간의 정체성과 연결된 감정적 충격을 야기합니다. 관객은 조이를 보며 '진정한 관계란 무엇인가', '캐릭터의 유일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조이는 단순한 AI 프로그램을 넘어서, 고유한 감정을 가진 비물질적 존재로 기억됩니다.
현실을 대체하는 가상배우: 인간 없는 연기의 미래
최근에는 실제 배우가 아닌 가상 캐릭터가 영화나 광고에 등장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가상 인플루언서 '로지', 중국의 루오톈이, 일본의 하츠네 미쿠는 AI 기반의 가상 인물로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으며, 영화 산업에서도 디지털 휴먼 기술을 통해 배우의 외형을 그대로 복제하거나 새롭게 창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상 배우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노화하지 않고, 일정한 이미지로 유지되며, 제작자의 통제하에 완벽한 연기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아이리시맨》에서는 배우의 나이를 인공지능 기술로 젊게 보정했으며, 《스타워즈: 로그 원》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 피터 커싱의 디지털 기술로 재현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기의 주체가 배우인지, 기술인지 경계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기술이 예술의 영역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배우'의 정의 자체가 재편되고 있습니다. 관객은 실제 배우와 가상배우를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과 표현에 몰입합니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서, 영화 속 주인공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열어줍니다. 앞으로의 영화는 인간과 인공지능,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더욱 희미해지면서, 전혀 다른 방식의 몰입과 공감을 만들어낼 것입니다.